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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공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_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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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공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_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알고또알기 2020. 9. 18. 02:30

쇼펜하우어는?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단치히의 어느 거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5살 때 함부르크로 이주하였고, 9~11살 때까지는 르아브르에 있는 부친의 사업 친구 집에서 지내며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깨쳤다. 그 뒤로 벨기에, 프랑스, 독일 각지를 여행하며 거기서 받은 영감과 인상은 그의 저작에 반영됐다. 또한 6개월 간 영국에 머물며 영어와 영문학 지식을 습득하였으며, 16살에 아버지 뜻에 따라 상업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는 어머니와 바이마르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그는 상업교육을 접고 괴팅겐과 베를린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철학, 문헌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해부학, 생리학, 지리학, 천문학을 수강하였다. 그는 1813년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뿌리에 관하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또한 바이마르에서 만난 동양학자를 통해서 고대 인도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자유분방한 삶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녀와 자주 말다툼을 벌였다. 결국 둘은 떨어져 사는 것도 모자라 절교를 하였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천재였으며 그 자신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는 "겸손이란 비열한 시기심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장점과 공적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걸하는 거짓 굴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하였으며 "겸양지덕이란 비속한 자들을 위한 멋진 발명품인 듯하다. 마치 이 세상에는 비속한 자들 밖에 양 그런 자들을 기준으로 말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니 말이다"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주저는 20년 동안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성격은 유전적 소질과 생의 운명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러한 성격은 그의 근본 사상과 체계의 세부적 사상에도 분명하게 반영되었다. 그의 따르면 성격은 아버지에 의해 결정되며, 지성은 주로 어머니에게 유전된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고집불통이었으며 자부심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반면에 어머니는 재치 있고 발랄하지만 생각이 다소 깊지 못하고 경박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상은 그에게 여성에 대한 그의 평가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성격을 결정지은 것은 강렬한 생의 충동과 열정적 의지란 요소와 자연의 아름다움과 피조물의 고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겸비한 지성이란 요소였다.

다행히도 쇼펜하우어는 노후에 자신의 업적에 가치가 있다는 정당함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1848년 독일과 유럽 각지에서 혁명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환멸감에 사로잡힌 지식층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그는 젊은 나이에 이 주저에서 자신의 전체 사상을 그려내었다. 이 책의 내용은 단 하나의 사상으로 집약된다. 그에 의하면 이 책에 담긴 사상은 모든 시대에 걸쳐 철학의 이름으로 모색되었으나 지금까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그런 사상이다. 이 사상의 전모는 세계란 의지와 표상이라는 이 책의 제목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문장으로 저작을 시작한다. 이는 칸트의 이론, 모든 사물은 우리에게 현상으로 주어는 것이라는 이론과 다른 것이 아니다. 칸트의 최대 업적은 현상을 사물 자체와 구별한 점에 있다. 이는 감각기관에 현상하는 세계란 참된 존재가 아니라는 플라톤의 견해와 같은 내용을 갖는 진리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칸트와 견해를 달리하는 결정적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물 자체'이다. 칸트는 현상의 영역에서만 타당한 범주를 사용해서 사물 자체란 개념에 이른다. 그러나 표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이런 표상을 초월해서 사물 자체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이란 전혀 없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세계 자체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통해 발견해야 된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외적, 내적 경험을 올바른 지점에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택한 입장이다. 즉 그는 칸트 이전과 독단론과 차이가 있지만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칸트의 견해와도 다르다.

 

의지로서의 세계

개인에게 신체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 우선 신체는 오성적 직관에 포착되어 인과관계 속에 있는 다양한 객체들 중 한 객체로서 주어지는 표상으로 주어진다. 그렇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의지라 불리는 것으로도 주어진다. 의지의 작용과 신체의 움직임은 어떤 원인에 의해 연결된 다른 두 가지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 신체적 활동은 의지가 객관화된 활동, 즉 의지가 직관에서 나타나는 활동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의 불가사의한 내면에서 지성을 종처럼 부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의지이다.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이다. 이 의지만이 불변의 것이며, 우리의 모든 표상의 근저에 놓여 있다.

인간의 모든 의식은 피로해지게 되며 잠을 필요로 하지만 의지만은 지칠 줄 모른다. 그런데 인간만이 이 본질상의 의지인 것은 아니다. 공간과 시간 내에서 우리를 둘러 산 모든 현상의 본질은 인간과의 유비에 의해 의지의 객관화로 해석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유기적 생명체가 그렇다. 그러나 생명 없는 자연현상들의 배후에도 의지는 숨어 있다. 행성들을 움직이고 인력과 반발력에 물질의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힘은 바로 무의식적인 세계 의지이다.

생물계에서 생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표현되는 것이 바로 생식 충동이다. 이성의 두 개인이 불가항력적으로 서로 끌리는 것은 바로 종족에서 작용하는 생의 의지 때문이다. 사랑은 종족보존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자연의 기만 수단이다. 개체가 성애가 종의 도구에 불과하듯 공간과 시간 내의 모든 현상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근거조차 알 수 없는 의지의 객관화일 뿐이다. 사물 자체란 바로 의지이다.

전체로서의 세계 의지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이 세계 의지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지 자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체들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상위의 전체 의지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세계의 고뇌와 구원

고뇌로서의 삶

의지는 무한하며 충족에는 제한이 따른다. 우리가 충동과 소망의 실현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지속적인 행복이나 안정을 구하지 못한다. 어떤 욕망이 충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움트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제거되어 안도의 숨을 쉴 참이면 새로운 불행이 찾아온다. 고통이야말로 삶에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며, 쾌락이나 행복은 그저 소극적인 것, 고통의 부재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염세주의적 세계관에서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심미적 구원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윤리적 구원의 길이다.

 

심미적 구원의 길

우리는 의지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예술을 통해 가능하다. 천재의 일인 예술은 인과율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사물을 고찰하는 방식이다. 예술을 감상하는데 의지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면 마음은 고통을 초월한 초지상적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 

 

윤리적 구원의 길

두 번째 구원의 길은 고대인도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길과 동일한 것이다. 의지의 작용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수단에 불과하기에 목표가 되는 것은 의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자들이 무아경, 황홀경 등이라 표현했던 상태이다. 이 목표는 불교의 열반이 그렇듯 부정적으로밖에 표현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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